동요소식

뉴스제보

동요 대부 박재훈 선생을 만나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수진 작성일 12-03-07 19:54

본문

동요의 代父, 박재훈 선생을 만나다

                                                朴 水 鎭 (시인)
     
                                                          만남 일시 : 2012. 3. 1(수) 16:00 ~
                                                          만남 장소 : 봉천동 현대아파트 104-102                                                        만난 사람 : 김정철, 박수진, 조원경, 한혜원
 

  ‘어머님 은혜’, ‘눈꽃송이’, ‘눈’, ‘산골짝의 다람쥐’, ‘봄노래’ 등 해방공간에 은총처럼 펼쳐놓은 국민동요를 작곡한 박재훈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박재훈 선생은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며 자신이 개척한 토론토 큰빛장로교회의 원로 목사이다. 이번에 그를 만나게 된 행운은 일간지에 크게 소개된 <“인간 손양원을 꼭 알리고 죽겠다”... 동요 대부의 ‘마지막 오페라’>라는 기사 덕분이었다. 조원경 사무국장이 취재 기자를 통해 거처를 알아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아흔 살 노구에 전립선과 갑상선 암을 앓고 있으며 협심증에 당뇨도 있고 1년 반 전에는 백내장 후유증으로 안구를 제거한 상태로 그야말로 ‘움직이는 종합병동’이라고 하여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다.
 선생이 임시로 머무는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자 노 부부는 까마득한 동요인 후배들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정장 차림으로 쇼파에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선생은 웃음을 머금은 온화한 표정에 한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자리에 앉으며 우선 호칭부터 여쭈었다. 초등학교 교사에서, 작곡가, 대학 교수, 박사, 목사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따라붙는 호칭이 다채로운 인생역정만큼이나 많기 때문이다.

 “아무렴은 어때요. 사람이 하나인 걸”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롭게 목사님과 선생님이란 호칭을 적절히 섞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 귀국 목적이기도 하며 다음 주에 예술의 전당에서 막을 올리는 오페라 <손양원> 팜플렛을 나누어 주기에 먼저 오페라에 대한 화제에서 출발하여 자연스럽게 동요이야기로 넘어갔다. 

 “해방이 되었을 때 소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있었어요. 그런데 광복이 되고나자 막상 가르칠 자료가 없어요. 그래서 해방 직후인 8월 29일부터 3일간 교회에서 50곡을 작곡했지요. 가사는 그 전에 나왔던 잡지 <소년>과 <아이생활>에서 선택했는데 아름다운 동시가 참 많았어요. 그렇게 나온 것이 ‘산골짝에 다람쥐’ 등 많이 불리는 동요지요.”

  해방이 되자마자 북한은 이미 공산주의가 자리잡고 모든 것이 명령에 의해 가르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6년 월남을 하게 된다. 가지고 온 것은 써 놓았던 동요 악보가 전 재산이었다고 했다.

 “ 남쪽에 오니 노래가 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에요.  ‘반달’, ‘고드름’, ‘오빠생각’, ‘새나라의 어린이’ 정도가 고작이어서 1946년 <일맥(一麥) 동요집>을 펴내 퍼뜨렸지요. 갱지를 등사지로 밀어 만든 그것이 해방 후 최초의 동요집이지요. 그 후 1956년엔가 <권길상 동요집>이 나왔구요. 그렇게 만든 동요들이 유치원과 서울중앙방송 라디오를 통해 퍼져 나갔어요.”

  동행한 동요박사 김정철 부대표가 1948년에 발행된 선생의 동요곡집 <산난초>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반색하며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책이라며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동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보람도 얻었다.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잘못 나와있는 그의 출생지가 철원 북쪽 김화군 김성면이라는 것과 1947년 작곡되어 국민노래가 된 ‘어머님 은혜’가 본래는 어린이 찬송가로 만들어졌으며 ‘산이라도 바다라도~’로 시작하는 3절이 ‘하느님 은혜’라는 가사 때문에 교과서에 실리면서 빠져 버렸다는 사실 등……. 특히 그동안 작사 미상으로만 알려진 '펄펄 눈이 옵니다'(눈)의 작사가는 '가을밤'을 지은  이태선 목사이며 ‘시냇물은 졸졸졸졸’은 작곡가마저 작사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유명한 ‘산골짝의 다람쥐’(다람쥐)를 작사한 김영일 선생과는 한 차례도 만난 적이 없고  젊은 시절 자신이 많은 곡을 붙인 작시가 이태선 목사(2회)를 비롯해 ‘어머님 은혜’의 작시가 윤춘병(1회), 작곡가 장수철(1회), 구두회 선생이 모두 평양 요한학교 동창이며 자신은 3회 졸업생인데 1940년대 초 이 학교를 졸업한 이들 중에는 목회자가 많다고 한다. 그밖에 <가을맞이> <봄> <은행잎> 등 찬송가를 작곡하기도 한 장수철 선생이 선명회합창단 초대 지휘자였으며 그 뒤를 이어 박재훈 선생 자신이 2대 지휘자로 활동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많이 알려진 <모두 모두 자란다 시시때때 자란다>가 원래는 어느 은행의 저축 캠페인 송이었어요. 자란다는 말은 돈이 쌓여간다는 뜻인데 은행 관계자로부터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처음에 작사자가 누군지도 몰랐고 만난 적도 없었지요.”

 한때 우리 교과서에 20여 곡이 수록되어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동심의 고향을 만들어준 뛰어난 동요작곡가 박재훈 선생. 서울 금양초등학교와 대광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미국 유학 후 한양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오페라 <에스더>를 작곡하고 3.1운동에 관한 장대한 역사 오페라를 만드는 꿈을 꾸며 음악공부를 더 하기 위해 1973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그 꿈은 아직도 미제로 남았지만 2000년에 오페라 <유관순>을 완성해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만 90세가 된 이번에 막을 올리는 ‘마지막 오페라’ <손양원>은 수년간 병마와 싸우며 믿음과 의지를 앞세워 작곡에 매달린 소중한 결과물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 아픈 손가락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아끼는 동요가 있는지를 물었다.

 "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셔요~ 그거 좋지ㅡ 않아요?"

  '병아리떼 뿅뿅뿅 놀고 간 뒤에 ~' 하고 우리는 마치 노란 봄병아리라도 된 양 뒤를 이어 불렀다.
  동요의 대부 박재훈 선생을 만나며 확인한 것은 한 번 동요인은 영원한 동요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그는 먼 이국 토론토에서 동요작곡집을 출간하고 교회를 통해 해마다 동요대회를 개최하며 동요보급에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동요 후배들과 동요문화협회의 활동에 매우 만족해하며 동요박물관 건립에도 큰 관심과 기대를 나타냈다. 
 안악고녀를 졸업한 인텔리 사모님과 사이에 남매를 두고 있으며 아들과 사위가 목사라고 한다. 믿음의 가정을 이룬 원로 동요 작곡가이자 목회자로서 정갈한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 우리는 친필 사인을 청해 받고 후배 동요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영상으로 담았다. 그리고 기도를 청해 무릎을 꿇고 둘러앉으며 아쉬운 만남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가 오랜 세월을 두고 오페라로 그리고 싶어하는 93년 전 3.1운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날, 3월 1일이었고 거리에는 이른 봄기운이 가득했다. <끝>